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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 덕분에 그나마 '고졸' 됩니다

잘 되고 있어 2015. 6. 3. 10:43

급식 덕분에 그나마 '고졸' 됩니다

시사INLive | 정은정 | 입력 2015.06.03. 09:16

'○○야, 오늘 돈가스 나온대. 빨리 학교 와. 밥은 먹어야지.'

번듯한 아파트 한 동 없이 고만고만한 다세대주택이 밀집한 경기도 외곽의 한 고등학교. 말이 인문계이지 원서만 내면 그냥 들어오는 학교다. 이곳에 근무하는 교사 이 아무개씨는 출석 시수가 모자라 퇴학 위기에 처하는 학생들을 많이 봐왔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졸업장이나마 들려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이 교사의 의무라고 여기는 이 선생님은 지각과 결석 단골들에게 전화를 돌려 잠을 깨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못 오는 이유는 별거 없어요. 그냥 아침에 일어나지를 못해서거든요. 눈떠서 시계 보고, 이미 수업 시작했다 싶으면 가기가 싫어지는 거죠.' 이는 곧 일어나서 학교에 가라고 야단을 쳐줄 부모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끼니를 제대로 챙기는 일도 요원하다. 그래서 매번 먹히는 유혹의 기술은 아니지만 나름 성공 확률이 높은 돈가스로 추파를 던져본다. 그럼 저 멀리 '삼선 쓰레빠'를 질질 끌고 교문에 들어서는 제자가 보인다. 그야말로 '오늘도 무사히'.

교실 붕괴 현상에 대한 이야기는 지겹도록 들어왔다. 그 붕괴는 다름 아닌 아이들 몸의 붕괴다. 인문계 아니면 실업계로 나뉘던 단순한 고등학교 입시 체계는 이제 쓸 만한(?) 학생들은 특목고나 자사고로 미리 빠지고 나머지 학교들이 아이들을 나눠 갖는 체제로 바뀌었다.

대다수 '일반고'는 여러 처지의 학생들이 뒤섞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지역별·학교별 계층적 특성이 뚜렷하게 갈리고 이는 곧 교실에서 버틸 수 있는 몸의 차이로 드러난다. 스스로를, 때로는 서로를 잉여·루저·'네똥기'(김성모의 만화 <스터프 166㎞>에 나오는 대사 '네놈은 그냥 하루하루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이지'에서 유래한 인터넷 은어)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책상에서 허리를 곧추세우지 못한다.

퇴학 위기까지는 아니지만, '학교를 왜 다니느냐 물으면 그냥 학교니까 다닐 뿐인데 자꾸 왜 다니느냐 물으시면…' 수준의 아이들. 시험 날짜도 모르고 당연히 시험 범위도 모른다. 그런데 이 학생 책상에 떡하니 붙어 있는 것은 급식 식단표다. 단어 하나 외울 뇌의 공간은 없지만 식단은 줄줄 외운다. 만약에 공지된 식단표대로 급식이 나오지 않으면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학교의 사정상 식단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라는 비고는 '비보'로 읽힐 뿐이다. 학업성취도가 낮고 긴 수업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는 학생들에게 급식은 유일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 ⓒ한지혜 그림 :

ⓒ한지혜 그림

이른바 문제아가 아니더라도 공부하는 재미로만 학교를 다니는 일이 가능할까. 기성세대인 우리도 공부하는 재미로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친구들과 노는 재미와 도시락을 까먹는 재미가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친구들과 노는 '우정의 공간'은 이미 해체되었으니 남은 것은 밥 먹는 재미뿐이다.

공부깨나 한다는, 과학고나 외고에 다니는 학생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이들은 학습의욕이 강하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교사의 말에 집중하려 애쓴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다가도 잠이 쏟아지면 스스로 화들짝 놀라 교실 뒤에 있는 입식 책상에 서서 공부를 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하루 중 언제가 가장 좋으냐고 물었더니, 단연코 급식 시간과 잠자는 시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숙사 생활이라 삼시 세끼를 급식으로 먹는데 지겹지 않으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래도 그때가 가장 편한 시간이기 때문에 좋다고 '공신'들도 입을 모은다.

'공부의 신'들도 좋아하는 급식 시간

상대적으로 형편이 넉넉하다는 강남의 고등학생들은 어떨까? 입시에 최적화되어 있는 강남 학생들은 학원 일정에 치여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엔 잠이 고파서 아침밥 먹을 엄두를 못 내고 학교 매점에 와서야 허겁지겁 빵 쪼가리를 입에 쑤셔넣곤 한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도 점심 급식은 제대로 된 밥상을 받는, 거의 유일한 한 끼다.

일선의 고교 교사들 다수가 학교 급식이 없었다면 많은 학생들의 식사가 편의점 음식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다수 아이들에게 급식은 숟가락·젓가락을 들고 먹는 밥과 국, 김치, 서너 가지의 반찬, 디저트가 갖추어져 있는 유일한 한 끼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하지.' 학교를 때려치우겠다는 자식들에게 부모나 교사가 달래며 하는 얘기다. 한국은 55~64세 연령대에서는 고졸자가 48% 정도지만, 25~44세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자가 98%에 육박한다(출처:e나라지표 www.index.go.kr). 즉 현재의 5060 세대가 청소년 시절이던 1970년대에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나름 고급 인력의 지표였다면,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출생증명서처럼 거머쥐어야 하는 필수 문서가 된 셈이다.

하지만 누구에겐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누구에겐 쉽게 거머쥐기 힘든 것일 수 있다. 하루 평균 200여 명의 학생이 교문 밖으로 쫓겨난다. 개중에는 자신의 신념으로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 탈학교 청소년들 다수는 학교에서 내쫓긴다고 보면 된다. 학교는 이미 계급·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차단된, 사다리 걷어차기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각종 지표나 사회통념상 '밥벌이의 최후 방어선'이 고졸이라면, 한 끼 급식은 그 최소 요건을 채워주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단가 4000원도 안 되는 한 끼의 급식이 평생 밥벌이의 보루가 된다면 가성비치고는 꽤 괜찮지 않은가.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경남의 급식을 유상으로 전환하면서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라고 했다. 어쩌면 이 말은 이미 선별되어 추려진 일부 학생들에게는 들어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에게는 '저기에 학교가 있다'라고 희미한 존재감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그나마 밥이다.

정은정 (농촌·농업사회학 연구자)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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