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눈치 보며 펠로시 홀대…尹정부는 '문재명' 함정에 빠졌다
입력 2022.08.18 00:01
그래픽=박경민 기자
역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돼 문재명(문재인+이재명) 10년을 막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취임 100일도 되기 전 윤 대통령 지지율이 20%대로(30%대 초반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주저앉았다. 여당은 이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내분으로 무기력하다. 그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지도부 선거에서는 대표에 이재명, 최고위원에 정청래·고민정 의원이 당선 유력이다. 이들이 누구인가? 민주당에서도 초강성 의원들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회복되지 않으면, 180석의 거대 야당 민주당은 5년 후 대선까지 기다리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박홍근 원내대표가 국회연설에서 공공연히 탄핵을 입에 올리는 게 지금 민주당 일각의 정서다.
반(反) 문재명이 윤석열 지지 기반인데
참담하다. 포퓰리스트 정부가 이어지면 대한민국에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우리 국민은 정권을 교체했다. 그런데 반년도 되지 않아 도로 원점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훗날 윤 정부는 '문재명 10년'의 짧은 에피소드로만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그런 혼란을 막으려면 윤 대통령은 이제부터라도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검사 윤석열이 대통령 윤석열이 된 이유, 즉 국민이 그에게 부여한 소임을 기억해야 한다. 따져보면 친(親)윤석열 유권자 집단은 애당초 없었다. 반(反)문재명 유권자 집단만 여기저기 있었을 뿐이다. '유능한 반문재명 정부'가 윤 정부 지지율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란 문재인 정부의 잘못된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고, 이재명의 민주당이 펼칠 포퓰리즘을 막는 것이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문재인 정부가 남긴 최악의 유산은 대외관계라고 생각한다. 최근 중국은 "한국 정부가 사드 '3불(不) 1한(限)'을 선언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사드 관련 협상은 지난 문재인 정부의 대중 저자세 외교가 어디까지 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사안이다. 문 정부는 '분단이 최대 현안이고, 친일 잔재가 그 원인'이라는 재야와 386 역사관에 충실했다. 그 결과가 친북·반일 외교, 그리고 이와 연동한 연중(聯中)·비미(非美) 외교(중국에 대한 저자세와 미국에 대한 거리두기)였다. 한국 외교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민족적 생사와 직결된다. 문 정부는 역사적 망상을 근거로 민족 생사를 걸고 도박을 벌인 셈이다.
2019년 중국을 방문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났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사실 문재인 정부 내내 한국이 주목해야 했던 건 중국의 변화였다. 시진핑이 내세운 ‘중국몽’(2013)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2017)는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 노선을 약화하며, 마오쩌둥 사후 억압되어 있던 스탈린주의를 복권한 것이었다. 스탈린주의는 지도자의 독재와 반동 세력의 숙청, 그리고 자국의 팽창을 인류 해방으로 간주한다. 시진핑의 영구 집권 시도, 홍콩에서의 대대적 숙청, 대만 침공 훈련 등은 어쩌다 일회성으로 발생한 일탈이 아니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세계 질서가 민주주의 동맹과 독재정부의 대결로 재편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건 미국이 패권을 쥐기 위해 내세운 고리타분한 명분이 아니다. 미·중 갈등은 약육강식의 패권 대결이 아니라, 인류가 지향할 가치를 둘러싼 대결이다.
윤 정부 여전한 중국 눈치보기
국제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문 정부는 대북 정책을 이유로 친중 정책을 강화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핵심인 일본과는 과거사 문제만 부각한 탓에 군사적 협력 분야로까지 갈등을 확대했다. 문 정부의 외교 정책은 한마디로 북한 비핵화는 달성하지 못한 채 중국발 동아시아 위기만 확대해 놓은 꼴이다. 세계 질서의 안정과 민주주의 증진에 역행하는 건 물론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 재건과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내세워 문 정부 시절 외교 전략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와 반도체 동맹(칩4) 참여 뜻을 밝혔고, 사드도 정상화하고 있다.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문 정부의 무거운 유산 아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 방한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지난 4일 김진표 국회의장과 기자회견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를 이유로 펠로시 의장을 만나지 않았다. 중앙포토
단적인 사례가 최근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홀대 논란이다. 휴가 중이라며 만남을 회피한 대통령의 행동은 누가 봐도 중국 눈치를 본 것이다. 윤 정부는 문 정부가 마음껏 누린 '상황의 지대(地代)'(rent of situation), 즉 지정학적 상황을 이용해 미국의 안보와 중국의 경제를 함께 취하는 전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문 정부가 위험한 외교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했던 배경에도 저 상황의 지대가 놓여 있었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는다? 아니다.
미·중 사이에서 한국이 누릴 수 있는 상황의 지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속이 붙었다. 이제 미국은 중국을 세계화의 동반자가 아니라 경제·군사 안보와 맞물린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한다. 중국의 행동에 따라 미국도 맞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윤 정부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문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중국과 밀접하게 교류하는 거대한 민간 부분을 고려한다는 명분으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문 정부 5년간 이와 관련한 아무런 준비가 없었고, 지금 윤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매우 좁다.
'국민 동의' 끌어내 역사적 소임 다해야
민노총, 한노총, 중앙통일선봉대 조합원들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뉴시스
한일 관계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상황의 지대가 사라질수록 그에 비례해 가치에 기반한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핵심은 한일 관계 복구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핵심인 일본을 뺀 한미동맹 발전은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문 정부가 헤집어 놓은 일반 국민의 반일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쉽지 않다. 그럼에도 정부는 동아시아 정세를 국민에게 충분히 알리고,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당연히 야당뿐 아니라 진보 시민단체와도 충돌할 수 있다. 국민통합을 위한 불가피한 갈등이다.
윤 정부가 '유능한 반문재명 정부'로 국민의 신뢰를 얻으려면 바로 여기서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운이 걸려 있는 쟁점에서 극명하게 전·현직 대통령, 야당과 여당의 차이를 드러내 국민적 동의를 끌어내야 한다. 문제는 윤 정부가 지금처럼 하면 이런 국민적 동의를 얻기 힘들다는 점이다. 지난 문 정부 취임 100일 즈음을 떠올려보자. 주 단위 계획까지 만들어 군사작전 하듯 정책을 밀어붙였고, 정부와 여당만이 아니라 지지자들의 소셜미디어까지 동원해 여론을 조성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현재 윤 정부와 국민의힘은 천하태평이다. 방향의 명확성도, 개혁의 절박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의 변화를 두고 여러 세계적 석학들은 현재가 역사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본질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윤석열 정부가 역사적 소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등에서 15년간 경제 및 노동 문제를 연구한 경제학자. 문재인 정부 5년간 이어진 민주주의의 퇴행을 비판적 관점에서 분석한 『대통령의 숙제』라는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