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대법원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전원합의체의 재판장인 김명수 대법원장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며,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라고 무죄 이유를 밝혔습니다. 13명의 대법관 중 무죄로 판단한 9명은 “병역 의무에 응하지 않았다고 형사 처벌하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4명의 대법관은 “질병이나 재난 등 객관적 사정이 아닌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주관적 사정이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소수의견을 냈습니다. 또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엄중한 안보상황, 병역의무의 형평성에 관한 강력한 사회적 요청 등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대법관들의 엇갈린 의견처럼 무죄 판결이 보도된 뉴스의 댓글난은 끓는 가마솥 같았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를 추려봅니다.
“병역의무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병역거부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납세의무가 있는데 양심적으로 거부해도 됩니까? 국가 혜택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가능한 것입니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무도 다해야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요,”
“국방의 의무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평화를 위해 있는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평화 타령해 가며 병역 기피를 하는 건지…” “‘양심적’이라는 말은 제발 쓰지 마라. 진짜 양심적으로 군대 다녀온 대부분의 국민이 너무 비참해진다.” “군대 안 가고 싶으면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되면 되는 거네? 참 쉽죠잉? 대한민국 남자들을 한 번에 멍청이로 만드는 것도 참 쉽죠잉?”
“대통령님.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든다면서요? 대다수 국방의무를 위해 다녀온 사람들을 비양심적으로 만들고 허탈하게 하는 이게 상식이 통하는 나라다운 나라입니까? 소수의 인권요? 대다수 사람들은 인권이 없어서 책임과 의무를 했습니까?”
“종교 하나 만듭니다. 면세교! 양심적으로 세금 납부 거부합니다. 교인 모집합니다. 선착순. 아, 민주당 권리당원은 가입 불가!”
“의무와 희생에 대한 조롱과 모욕이다.” “군대가 뭐 취미 생활하는 곳인가? 이 정부가 추진하는 군대 힘 빼기 작전의 일환이 아닌가?”
“이제 입영을 앞둔 젊은이들이 ‘진정한 양심’을 보여 줄 때가 아닌가 싶네요.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동시에 ‘진정한 양심’을 보여서 북한군이 걸어 내려와 서울 함락하고 부산 치더라도 집총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봤으면 싶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병역의무에는 책임과 의무가 없다는 것을 대법원이 인정한 것이니 무엇 하러 입영하고 병역의무를 지시나요. 그건 멍청한 짓이자 비양심적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병역은 불법’입니다.” “반드시 심판대에 오를 거다. 확신한다!”
논란은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지난 6월 기준으로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상고심은 200건을 넘었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966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대법원의 새 판례에 따라 이제 전국 각지에서 이들에 대한 새로운 양상의 재판이 열리겠지요. 양심적 병역거부가 반드시 ‘여호와의 증인‘이나 여타 종교인에 국한되는 일도 아닙니다. 개인의 소신, 신념에 따른 양심적 거부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을 어떻게 검증하고 판단할지 두고 볼 일입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22일 전주지법 허윤범 판사가 처음 현역병 입영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백 모(21)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20일 수원지법 안산지원 송영환 부장판사는 예비군 훈련소집에 불응한 홍 모(31) 씨에게 역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어릴 때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던 홍씨는 보충역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예비군 훈련을 4년간 받아오다가 득녀 후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부 지방병무청에서는 발 빠르게 병역 기피자들에게 신상공개 조치를 취소하고 행정제재도 해제한다는 공문을 보냈다고 합니다.
병역은 남성들이 사회생활의 출발선에서 풀어야 하는 가장 중대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현역 복무를 마쳐도 특혜는 고사하고 오히려 예비군이라는 또 하나의 짐을 덤으로 안고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입영을 앞둔 젊은이와 그 가족들, 아니 현역 근무자나 병역을 마친 사람들조차 그들의 군 복무와 그 의미에 대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나 개인적 신념도 없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군대에 가야 하는 것인지. 병역을 거부할 개인적인 소신조차 없어도 좋은 것인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는 거리가 먼, 소수의 포용(특혜?)을 주문하면서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정당한 것인지. 병역을 거부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면 그걸 국민의 의무로 두는 게 옳은 것인지, 군 가산점을 부정하는 마당에 병역의무를 남성에게만 요구하는 것은 타당한 것인지. 이 같은 시비와 논란이 군심을 흔들고 민심을 흔들 것입니다.
법원은 법의 뜻을 풀이하고, 그에 따른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기관입니다. 각종 분쟁을 심판하고 조정해 사회정의와 안정을 지켜주는 곳입니다. 그런 법원이 지금 우리 사회에 분쟁을 일으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듯합니다. 사법 적폐의 청산을 부르짖으며 출범한 ‘김명수 대법원’이 하고 있는 가장 큰 일이 과거 뒤지기와 병역거부에 대한 면죄부로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일로 보입니다.
하늘나라 판사님들은 이 땅 위에서의 논란쯤은 개의치 않는 눈치입니다. “대체복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거나 향후 도입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피고인에게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면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종교적 양심을 지켜줄 사명감이 절실하다 해도 최소한 헤쳐 나아갈 길이 먼저 마련된 후 내렸어야 할 판결이 아닐까요.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논의가 한창인 시점에 내린 대법원 판결은 아무래도 성급하고 무책임했다는 생각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이른바 ‘양심적 이유’를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데에도 많은 시비와 논란이 따릅니다. 아랍 국가들에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유대교도들은 남녀 불문코 군 복무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살생 금지는 물론 육식마저 기피하던 불승들까지 국난을 당해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무기를 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를 비양심적인 종교가라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종파의 기독교회, 여타 종교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의 기준으로 ‘그 신념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해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또 ‘삶의 전부가 그 신념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하고, 신념이 고정불변은 아니지만 분명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좀처럼 바뀌지 않아야 하며, 거짓이 없고, 상황에 타협적이거나 전략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어쩐지 날아가는 방귀를 잠자리채로 잡으라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대법원 소수의견조차 “형사소송법이 추구하는 실체적 진실 발견에 부합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할 정도입니다.
대법원은 또 “피고인이 양심적 거부라는 소명자료를 제시하면 검사는 자료의 신빙성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진정한 양심의 부(不)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입대를 거부할 젊은이들은 생활기록부라도 만들어 자신의 양심을 입증해야 합니다(일상생활과 범죄 심리가 일치할 리도 없겠지만). 또한 검사에게는 독심술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이 되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심사하려면 궁예의 관심법이라도 빌려와야 할 판입니다.
자유심증주의(自由心證主義)가 도를 넘어 법관이 하느님 같은 존재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심증을 근거로 처벌하는 ‘묵시적 청탁죄’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어느 여 시인은 “유부남 쳐다봤다가 묵시적 간음죄라면 어쩐다? 미남 청년 바라보다가 묵시적 음란죄라면 어쩐다? ~ 편의점 금고를 쳐다본 사람을 묵시적 도둑놈이라고 경찰에 고발이나 하러 다녀야겠다”고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시대에 앞서간다는 평가를 기대한 것일까요. 이상주의, 낭만주의에 기운 대법원의 무분별, 무대책, 무책임한 판결이 부를 사회 혼란이 염려스럽습니다. 이제 봇물 터지듯 전국 각지에서 신앙과 소신의 양심선언이 이어지고, 무죄 판결이 뒤따르고, 어떤 소신도 내놓지 못해 군에 입대하거나 비양심적으로 군 복무를 마친 젊은이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요?
뉴스의 댓글 속에는 정말 심사숙고해야 할 과제들이 넘쳐납니다. 저런 항의와 논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적어도 사회 안정과 정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서 대법원이 제구실을 하려 했다면 저런 정도의 문제점들은 미리 짚어보아야 했습니다.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사회 정의는 아닐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어야 했습니다. 대법원과 현직 대법관들을 발탁한 자들은 분노하는 젊은이들의 항의와 비판에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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