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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 박완서

잘 되고 있어 2019. 2. 22. 12:03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 박완서

 

 

                                     

우리집 오동나무 이층장 윗칸에는 남자 모자가 여덟 개나 들어 있다. 아랫칸은 비어 있다. 그 장 위에는 한 남자의 독사진이 놓여 있다.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지만 쓸쓸하고 복잡한 미소다. 때에 따라서는 우는 것처럼 보일 적도 있다. 원래 그 사진은 독사진이 아니었고, 웃음도 그렇게 쓸쓸하고 복잡하지 않았다. 사진으로 한 번 찍힌 표정이 때에 따라 변한다면 정신이 살짝 어떻게 된 사람의 수작 같지만 정말이다. 그 사진을 찍을 때 그는 건강하고 기쁨에 넘쳐 있었다. 그날은 그의 환갑날이었고, 우리의 아들 딸 손자들이 하나도 안 빠지고 다 모여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했으니까. 카메라 사진을 수없이 찍었는데도 사진관에서 나온 사진사가 우리 부부를 중심으로 가족과 일가친척을 다 불러모아 단체사진을 찍고, 가족사진 따로 찍고,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만 앉혀 놓고 찍었다. 사진사가 “김치”하는 대신 “자아, 찍습니다. 입 좀 다무세요. 너무 웃으면 첫딸 낳습니다.”하고 농지거리를 할 정도로 우리는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 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했던 건 환갑잔치 때문이 아니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우리 부부가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 중에서 그를 혼자 떼어내어 독사진을 만들기는 그 날로부터 삼 년도 안돼서였다. 영정으로 쓸려면 독사진이라야 하는데 그에겐 마땅한 독사진이 없었다. 나는 그의 영정을 그가 죽기 전에 만들었다. 폐암이 뇌로 전이되고 나서 그의 목숨은 무거운 추를 단 끈처럼 무서운 속도로 죽음의 나락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곧 죽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거짓 희망으로 그를 들볶았다. 병원 약과 방사선 치료만으로도 지칠대로 지친 그에게 좋다는 한약 생약을 다 실험하려 들었다. 탕약, 환약, 인삼, 영지, 어성초, 알로에 등 온갖 채소와 약초의 녹즙을 그의 입에 처넣으면서 꼭 고쳐놓고 말 테니 두고보라고 장담을 하곤 했다. 전부터 친히 지내던 한의사 한 분이 중국에서 구한 희귀한 비방대로 만들었다는 환약은 크기가 꼭 수수알 만한데 한 알에 만원씩 하는 고가품이었다. 값보다는 복용방법이 문제였다. 그 작은 알약은 그냥 삼키면 약효가 반갑되니까 꼭 혓바닥 위에 얹어놓고 반쯤 녹을 때를 기다렸다가 침으로 삼키라고 했다. 메마르고 백태가 앉은 혓바닥 위에서 아무리 작은 환약이라지만 쉬 녹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약 먹는 걸 제일 싫어했다. 그럼 난 무서운 얼굴로 그 약이 얼마나 신효한 약이라는 걸 강조하면서 그를 윽박질렀다. 나도 믿지 않는 걸 믿게 하려니 무서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 그의 손을 꼬옥 붙들고 잤다. 행여 내가 잠든 사이에라도 당신의 영혼이 육신을 훌쩍 떠나가지 않도록 지키고 있다는 몸짓이었고, 그도 그걸 알아주길 바랐다.



이렇게 결코 그를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처럼 굴면서 나는 뒤로 조금씩 그의 장사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와 나의 교적이 있는 본당 연령회장 댁 전화번호를 비롯해서 오랫동안 격조했지만 알려야 할 친척들의 연락처까지 수소문해서 메모해 놓는가 하면, 임종의 장소를 집으로 할 것인가 병원으로 할 것인가를 자식들과 수근수근 의논하기도 했다. 그리고 환갑 때 찍은 사진 중 부부의 사진을 딸을 시켜 사진관에 보내 아버지만 홀로 떼어내어 영정으로 쓰기에 적당한 크기로 확대를 해오도록 했다. 넉넉한 사랑을 받으며 나이 먹은 티가 역력한 흡족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어 골라잡은 사진이었다. 그러나 미리 만든 영정사진을 받아보고 나는 그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뜨끔하고 말았다. 장식 없는 나무틀 속에 확대된 그의 미소는 암만해도 나하고 나란히 앉아 찍은 환갑사진 속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끊임없이 불어넣은 거짓 희망에 속아주고 있을 뿐 결코 정말 속고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엷은 미소가 감도는 눈매는 남의 속을 지그시 들여다보면서도 노염을 타거나 무안을 주려는 게 아니라 연민으로 감싸는 쓸쓸함 때문에 우는 것 같기도 하고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되려 나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개나 되는 모자는 다 그가 죽음을 앞둔 마지막 일년 동안에 사 모은 것이다. 모자가 유행하는 시대도 아닌데, 일 년 동안에 모자를 여덟 개씩이나 사다니, 누가 들으면 그가 몸치장 따위에 취미가 각별한 멋쟁이 신사였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단 한 가지도 값 나가는 게 없을까 놀라고 민망해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비롯해서 가깝게 지냈던 조카들은 그가 쓰던 걸 뭐든지 한 가지씩이라도 얻어 갖길 원했다. 다들 그런 게 아쉬운 처지가 아닌데도 그런다는 건 그 뜻이 소유나 쓸모에 있지 않고 애장에 있으려니 싶어 나는 목이 메이게 감격을 했다. 크게 성공하거나 성취한 건 없어도 생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이 사랑 받았다는 증거 같아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유품을 공평하게 노느매기를 했다. 그러나 모자는 다 내가 가졌다. 그건 누가 달래지도 않았지만 달라고 해도 안 주었을 것이다.

마지막 일 년은 참으로 아까운 시절이었다. 죽을 날을 정해 놓은 사람과의 나날의 아까움을 무엇에 비길까. 애를 끓는 듯한 애달픔이었다. 세월의 흐름이 빠른 물살처럼 느껴지고 자주자주 시간이 빛났다. 아까운 시간의 빛남은 행복하고는 달랐다. 여덟 개의 모자에는 그 빛나는 시간의 추억이 있다. 나만이 아는.
마지막 일 년은 새벽잠을 설치게 하는 그의 기침소리로부터 비롯됐다. 담배를 워낙 즐기는 그는 새벽참에 쿨룩거리길 잘했다. 그러나 참아도 될 걸 가장이 일어났다는 표시로 일부러 소리를 내보는 것 같은 약간의 허세스러운 것이었따. 나는 어려서부터 기침과 기침(起 枕)을 동일시하는 말버릇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린 날 사랑에서 할아버지의 엄엄한 기침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할아버지 기침하셨구나, 하면서 나에겐 양칫물과 소금그릇을 들리고 당신은 세숫대야를 들고 종종걸음을 치셨다. 남자들이란 나이 먹어 아침잠이 줄면 으레 일어났다는 표시로 기침을 하는 거려니 예사롭게 듣던 소리가 어느 날부턴지 문득 귀에 거슬렸다. 일부러 내는 게 아니라 억지로 참으려 해도 복받치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그는 괜찮다고 했다. 새벽 담배가 안 좋은가 봐, 안 피우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정도로 눙치려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각증상이 전혀 없고 기침도 새벽녘의 잠시 동안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병원에 가봐야한다고 우겼고, 그가 마지못해 따라나선 게 기침소리에서 이상한 걸 감지한 지 불과 사나흘만이었건만 X선 소견만으로도 폐암이 거의 확실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당장 입원해서 정밀검사 결과 역시 틀림이 없었다. 아주 초기니까 항암제로 치료가 가능하다고 자식들은 나를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전에 벌써 자식들이 전화로 수근대는 소리를 엿듣고 말았다. ‘스몰 셀’, ‘엑스텐디드’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 어찌하여 그 뜻은 그다지도 명로했던지. 특히 EXTENDED 는 정확한 스펠과 함께 그 뜻이. 가슴 속에서 차가운 얼음조각이 명치로 내려앉듯이 통로가 분명한 차가움으로 느껴져와 나는 전화기를 놓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 속의 차디찬 이물감은 차차 손끝 발끝으로 시리게 퍼졌다.


스몰 셀이란 폐에 생기는 암의 종류 중의 하나로 문자 그대로 작은 암세포가 고루 처지는 소세포암을 이름인데 진행이 빠르고 초기에도 수술이 부가능한 대신 항암제는 아주 잘 듣는 암이라고 했다. 아주 잘 들으면 완치될 수 있단 소리냐고, 나는 주치의와 역시 의사인 아들과 사위에게 따로따로 추궁을 했고, 그러문요, 그러문요, 하는 그들의 선선한 대답을 얻어냈지만 믿지 않았다. 그의 새벽기침에서 여늬 때와 다른 불길한 울림을 가려내고부터 갑자기 민감해진 눈치로 자식들의 선선한 대답이 거짓임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스몰 셀이 문제가 아니라 엑스텐디드가 문제였다. 주치의한테서도 자식들한테서도 그 이상 알아낼 수 없게 되자 나는 집에 있는 의학책들을 뒤져 그 상태의 폐암이면 적절한 치료를 받아도 팔 개월내지 일 년밖에 못산다는 걸 알아냈다. 이 년 이상 생존율은 2.5%, 이왕이면 완치율이라고 할 것이지 인색하게 이 년 이상 생존율은 또 뭐람.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자기들 책 잽히지 않을 것만 우선으로 한 의사들의 야박한 말버릇이었다.


항암제 주사는 바늘이 꽂힐 때 한 번 따끔하고 마는 보통주사하곤 달랐다. 꼬박 사흘 동안 입원해서 수도 없는 주사를 시간과 순서에 따라 번갈아 맞아야 하는 거창한 주사였다. 하루밤 사이에 맞아야 할 주사약만 해도 바퀴 달린 테이블에 하나 가득 넘쳤고, 그 각기 다르면서도 위세등등한 모습은 마치 하룻밤 동안에 쏘아대야 할 대포알을 방불케 했다. 아닌게아니라 투병은 곧 전쟁이었다. 항암제가 몸 안으로 흘러들면 환자는 곧 오장육보까지 쏟아낼 것처럼 심한 구역질을 시작했고, 항암제와 함께 빠른 속도로 주입되는 링겔 때문에 변기를 줄창 대고 있어야 할 만큼 오줌 마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그놈의 대포알이 암을 명중시키기 전에 사람 먼저 잡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룻밤만 악전고투를 치루고 나면 다음 이틀은 한결 수월했다.
 



더욱 신기한 건 그 첫 번째 항암제 주사로 거짓말처럼 말끔히 새벽기침을 안 하게 된 거였다. 암이란 자각증상이 없어졌다고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들어서 알고 있으련만도 그 악명에 비해서는 너무 쉽게 기가 꺾인다 싶었다. 앞으로도 삼 주에 한 번씩 그런 치료를 언제까지나, 암이 이기든 인체가 이기든 결판이 날 때까지 받아야 했으므로 그의 퇴원은 재진과 재입원이 예약된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럼으로 하여 더욱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건강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자유가 보장된 바깥세상은 그에게 황홀했으리라. 그는 어디 가서 맛있는 걸 사 먹자고 했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급한 마음에 우리는 채 그 동네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동숭동 일대에 널린 음식점 중에 하나를 골라 잡았다. 그는 돌솥비빔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내가 시킨 갈비탕에서 갈비까지 한 대 건져다 먹었다.


항암제를 맞으면 맞는 동안은 물론 그 후 며칠간은 속이 느글거려 아무것도 못 먹는다,. 항암제를 맞으면서 체력을 유지하려면 그저 잘 먹는 게 수다, 항암제는 또 백혈구를 감소시켜 그로 인하여 주사를 못 맞게 되는 수가 곧 생긴다, 주사를 못맞게 되면 끝장이다, 백혈구 생산을 위해서도 잘 먹는 수밖에 없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딴 환자 가족으로부터 수없이 얻어들은 정보는 대강 그러했다. 도대체 어쩌란 소린지. 고약한 병답게 진퇴양난의 섭생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왕성한 식욕을 보자 나는 그가 그 중의 한 고비를 거뜬히 뛰어넘은 것 같아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는 식당을 나와서 택시도 잡기 전에 먹은 것을 길바닥에 다 토해놓고 말았다. 그가 토악질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괴로움보다는 길 가는 사람에게 미안하고 챙피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기 몸 상태에 대해 그 정도도 모르고 마구 먹어댄 그의 미련함이 싫은 생각도 났다. 토하고 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무실에 들렀다 집에 갈 테니 나 혼자 가라고 했다.

“당신 미쳤어?”
나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 치는 소리로 말했다. 투병의 초긴데 벌써 이상하게 굴려는 것 같아 노방의 토악질보다 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내버려둬, 나 하고 싶은 대로......”
그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슬프고도 단호한 느낌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길에서 놓아 주었다. 그가 가야한다는 사무실은 실상 별것도 아닌 데였다. 은퇴한 노인들 몇이서 공동으로 경비를 부담하고 유지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그 동안 못 나갔다고 밀린 일이 있을 것도 아니겠다 퇴원하자마자 얼굴을 내밀어야 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그가 이상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암환자 가족들로부터 들은 이야긴데, 가장 못할 노릇은 육신이 손을 들기 전에 정신이 먼저 망가지는 걸 지켜보는 고통이라고 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입이 타게 조바심하며 저녁 준비를 했다. 도무지 내 정신이 아니었다. 부엌 조리대에선 작은 창을 통해 버스정거장을 내다볼 수가 있었다. 저녁노을 속으로 그가 돌아오고 있었다. 손엔 이 홉들이 소주병을 달랑 들고. 그건 그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던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은퇴하기 전이나 후나, 예고하지 않고 늦는 일이 없었고, 저녁 먹을 때에 한하여 이 홉들이 소주 삼분의 일 내지 반 병 정도의 반주 습관이 있었다. 집에 소주가 남아 있는데 더 사오는 일도, 없는데 안 사오는 일도 없는 그였다. 어머, 소주가 떨어졌나 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맥없이 쉽게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어한 게 별게 아니라 보통 때처럼 구는 거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그를 보통 때처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 눈엔 그의 모습이, 그의 존재가 시간과 마찰하면서 빛을 내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 나는 신혼 때처럼 가슴을 울렁이며 그를 마중했고, 그는 어디까지나 보통 때처럼 저녁 반찬 뭐냐고부터 묻고 씻는 둥 마는 둥 밥상을 받고 소주 반 병을 아껴가며 마셨다.



“담배를 끊으니까 술맛이 유별난데.”
“거봐요, 담배 끊기 잘했지 뭐에요.”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치 술맛을 위해서 담배를 끊은 것처럼 굴었다. 그는 안주로 먹은 적지 않은 밥반찬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맛있게 먹은 저녁밥도 토하지 않았다. 잘 자고 기침 없이 깨어나 손수 커피 끓여 마시고 내 머리맡에도 한 잔 갖다 놓았다. 제 시간에 버스 타고 출근했다가 제 시간에 버스 타고 돌아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거였다. 너무 감지덕지해서 감히 입 밖에 내서 말하기도 겁났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가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주워 모은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되었고, 그건 날로 늘어나 두 번째 항암주사를 맞고 나서부터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 인체에서 가장 암세포와 닮은 세포가 머리카락 세포여서 항암제를 맞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암이 그만큼 죽어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이미 들어서 아는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숱 많은 머리칼이 수시로 한 움큼씩 빠져 단시일 내에 아주 없어져가는 걸 지켜보는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우울하고 참담했다. 무성하던 머리칼이 한 오라기도 안 남은 늙은 남자의 두상은 그 나이에 흔한 대머리하고는 또 달랐다. 대머리는 보통 피부보다 더 유들유들 윤이 나 한눈에 강인한 인상을 주지만 그의 머리 빠진 두상은 마치 머리칼이 귀하게 태어난 갓난아기의 두상처럼 피부가 희고 여려 보였다. 정말이지 크기만 좀 크다뿐 머리 귀한 갓난아이 두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대머리는 아니고 보오얀 솜털이 성기지만 고루 뒤덮여 있는 것까지 똑같았다. 그러나 아기의 솜털은 장차 머리카락이 될 희망이지만 그의 여려 보이면서도 결코 근절되니 않는 솜털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때부터 자식들이 아버지를 위해 모자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사온 모자는 갈색 쎄무 캡이었다. 의외로 모자가 잘 어울렸다. 써보기 전엔 형사나 무슨 기관원이나 쓸 것 같은 모자여서 별로 탐탁지 않더니만 써보니 십년은 젊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장난꾸러기처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점퍼엔 괜찮은데 신사복엔 암만해도 좀 어색했다.
“왜 중절모로 사오잖구, 이왕이면 최고급으루다.”
나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불평을 했다. 나는 그의 갓난아기처럼 애처로운 민둥머리에다 최고의 사치를 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중절모가 유행하는 시대가 아니다.

우리가 혼인할 때는 다들 지금보다 훨씬 못 살 때였고 게다가 전쟁중이었는데도 어른 남자가 출입할 때 모자는 필수적이었다. 문자 그대로 의관을 갖추지 않으면 행세할 수가 없었다. 염색한 군복을 입었으면 역시 염색한 군모를 얹고 다녔고, 두루마기엔 약간 찌그러진 듯한 중절모가 제격이었다. 혼인날을 받아놓은 어느 화창한 봄날, 그가 약복을 맞추러가는데 같이 가달라고 했다. 조선 호텔 앞에 있는 양복점이었는데 환도 전의 적막하고 헐벗은 서울에서 그 집은 딴 세상처럼 으리으리해 보였다. 영국산 양복지가 첩첩이 나긋하고도 품위있게 걸려 있고, 같은 양복지로 빼입은 지배인 역시 나긋하고 품위가 있었다. 그는 그 비싼 양복을 두 벌이나 맞추었고, 나는 그를 위해 양복지를 고르면서 그가 부잔가보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하고 이 년이나 넘어 연애를 했지만 한두 번 가본 집이 제 집이라는 것밖에는 그의 재산 정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궁금해하지도 않았으니까. 혼인할 남자가 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과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간 서글프지가 않았다. 그가 무작정 들뜨고 행복해 보이는 게 괜히 안돼서였다.



내가 어느 날, 느닷없이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고 했을 때, 식구들의 놀라움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아마 배신감도 섞인 분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까지 나는 식구들을 벌어먹이는 입장이었다. 육이오 난리통에 식구 한둘쯤 잃지 않은 집이 어디 있을까만은 오빠가 비명에 가고 난 우리집의 후유증은 좀 유별났다. 오빠는 어머니에겐 하늘 같은 외아들이었고, 올케에겐 신혼 삼 년 째의 새신랑이었고, 연년생의 조카들에겐 생명만 주었을 뿐 낯도 익히기 전에 가버린 무책임한 아빠였다. 그 일을 당했을 때, 어머니나 올케의 비통은 꼭 따라죽을 기세였다. 그래도 시일이 지나면 어린 것들을 생각해서라도 살아나갈 궁리를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성질이 모질지 못해 비록 스스로의 목숨을 꾾지는 못할망정 살아갈 궁리를 할 의욕이 전혀 없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따라 죽고 싶은 건 조금도 엄포나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난 그럴 수 없었다. 나 역시 그들 못지않게 오빠를 사랑했지만 오빠를 따라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살고 싶었다. 나는 순전히 내가 먹고 살기 위해 폐허나 다름없는 황량하고 살벌한 최전방 도시에서 겁 없이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요행 미군부대에 취직이 되어 얼떨결에 식구들을 부양하는 입장이 되었는데 그것도 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특히 난리나던 해의 9월, 함포사격과 무차별폭격 중에 태어나, 젖과 보살핌의 부족으로 사람될 것 같지 않던 어린 조카가 우유를 실컷 먹을 수 잇게 되자 토실토실 살이 오르기 시작한 건 기쁨이자 보람이었다. 아기의 놀라운 생명력은, 무덤의 곁방살이인 양 살아있는건지 죽어있는 건지 분간이 안될 만큼 침체된 생활에 하루하루 생기를 불어넣었다.


식구들은 아기를 따라 웃기 시작했고, 나에게 미안해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올케에게 살아보겠다는 의욕이 생기자 딴 사람처럼 용감해졌다. 당시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가 양공주들이 밀집해 있는 기지촌으로 옷가지나 화장품 따위를 이고 다니며 파는 보따리 장수였는데 올케가 그걸 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못했다. 증조모까지 생존해 계신 양가집 맏딸로, 여고 졸업 후 줄창 부모 슬하에서 엄한 훈도를 받다가 시집 온 올케는 어머니 마음엔 들었을지 모르지만 나 보기엔 여간 답답한 맹초가 아니었다. 그 시절의 기준으로도 요샛 세상에 저런 여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얌전하기만 하던 올케가 어찌어찌해서 장사 중에서도 가장 쌍스러운 기지촌 보따리 장수길을 트더니만 일 년만에 변두리 시장에 가겟터를 하나 얻을만한 돈을 모았다. 올케의 자립능력을 믿게 된 나는 그 가게가 개업할 무렵 내 혼인 얘기를 꺼냈다. 그때야말로 내가 집을 떠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적기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식구들의 생각은 달랐다. 올케가 그렇게 빨리 목돈을 모은 건 그동안 내가 전적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렸기 때문이란 걸 알아준 건 고마웠지만, 그래서 더욱 나를 놓치고 싶자 않은 거였다.

조금만 더 같이 고생해주면 살 만해질 게 확실한데 그 동안을 못 참고 시집을 가겠다니 괘씸하고 야속한 게 친정식구들의 인지상정이자 욕심이었다. 생전 데리고 살 것도 아니면서 다만 때가 이르다는 식구들의 생각과, 바로 이때다 싶은 내 생각과의 차이는 단지 시기의 문제에 불과하련만도 그렇지가 않았다. 특히 어머니는 사사건건 사위 될 사람에 대해 트집을 잡고 싫어했다. 당신도 외며느리 거느리고 살면서, 너만은 시집살이 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그가 부모를 모셔야 하는 외아들인 걸 못마땅해하는 것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됐지만, 그의 성이 벽성(僻姓)인 걸 가지고 너무 오래 탄식하고 얕잡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세상에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이라고, 헌다헌 양반 중에서도 노론허구 아니면 통혼을 안하던 집안인데 아무리 쑥밭이 됐기로서니 백줴 상것한테 내 딸을 내주다니, 아이고 우세스러워.”
이런 식이었다. 마침내 그를 집으로 데려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우리 식구들이 허세부리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허락을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가 당해야 할 고비를 생각하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는 우리 집에 어른 남자가 없다는 약접을 보강하기 위해 외삼촌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외삼촌은 평생 돈벌이라곤 안해 보고 놀고 지낸 분인데 언변이 유창하고 박식했고, 특히 양반 족보에 통달했다. 내 꼬인 생각인지는 몰라도 신랑감이 만의 하나라도 양반 행세를 하면 여지없이 폭로해 망신을 주려는 어머니의 포석임이 분명했다.

사위 될 사람에 대한 기대나 호의는커녕 일말의 호기심조차 없이 트집 잡을 궁리만하고 진을 치고 있는 식구들 사이로 그를 불러들여야 하는 내 심정은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는 초대된 것만 좋은지 싱글벙글하면서 나타났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외삼촌은 “우리 집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을 서두로 우리가 얼마나 뼈대 있는 집안이란 걸 늘어놓고나서, 그의 지체를 캐묻기 전에 짐짓 난감하고도 동정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그닥 오랫동안 외삼촌의 시험에 들지 않고, 선대가 종로에서 선전을 하던 중인 집안이라고 그의 지체를 털어 놓았다. 양반이 아니면 사람도 아니라고 여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중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가 어쩌면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한지 나는 속이 다 후련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확신이 잘 서지 않던 나의 선택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를 망신주려던 외삼촌의 작전은 이렇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었다. 그를 보내놓고 나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어머니가 외삼촌에게 물었다.

“선전을 했다니, 그게 아전보담 좀 나은 벼슬인가? 못한 벼슬인가?”
“누님도 참, 선전 시정의 비단 감 듯한다는 속담도 못들으셨우? 벼슬을 했단 소리가 아니라 포목전을 했단 소리예요.”
“그게 무슨 자랑이라구.”
“보아하니 그 사람 그게 창피하다는 것도 모르는 눈칩디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이렇게 다시금 그를 깔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지만 형식적으로라도 몇마디쯤 반대를 할 줄 알았는데, 저 애 고집을 누가 꺾겠냐는 식으로 허락이 떨어졌다. 그렇다고 아주 호락호락한 허락은 아니었다. 지체가 떨어지는 데로 시집가는 대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으니까. 우리가 혼수를 장만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건 나도 빤히 아는 사실이었다.



이왕 못해 보내는 거 듣기 좋게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말도 얼마든지 있으련만 이렇게 야박하게 굴었다. 비록 딸자식을 맨몸으로 시집보낼망정 당당하고 싶은 거였다. 나는 절대로 굽 잡히기는 싫어 안간힘 쓰는 우리 집안의 이런 체면 차리기가 면구스러웠고, 그런 야박스러운 허락에도 감지덕지해가며 양가에서 나누어 해야 할 혼인준비를 혼자 떠맡은 그가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심정적으로나마 어느 쪽을 역성 들 수도 없는, 짓눌리는 듯 무력하고 우울한 시기였다.


양복을 맞추고 난 우리는 미장원에 들러 신부화장이랑 면사포를 예약했다. 뭐든지 다 최고급으로 해달라며 예약이고 뭐고 없이 전액을 지불하는 그를 보며 또 한번 그가 부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양복점에서처럼 그 생각이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울고 싶도록 울적했다. 미장원을 나와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그는 신부쪽에서 꼭 장만해야 할 것이 무엇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다. 그는 바보처럼 눈치가 없었다. 내 우울을 도무지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불쑥 나도 그에게 뭐 하나 사주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직장에서 받은 마지막 월급만은 집에 내놓지 않고 꿍쳐가지고 있었다. 그는 덮어놓고 괜찮아, 괜찮아 했다. 그러나 입가로 비죽비죽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모자를 사주고 싶어요, 최고급으루다.”
“모자도 곧 살 거니까 염려 말아요.”
“내가 사주고 싶다니까.”
“비쌀 텐데......”
양복지도 그렇지만 모자도 국산품이란 아예 있지도 않을 때였다. 우리는 명동에 몇 안되는 양품점을 다 뒤져 꼭 마음에 드는 중절모를 찾아냈다. <필그림>이란 상표가 붙은 고가품이었다. 밝고도 기품 있는 회색빛 몸체에다 그보다 약간 짙은 빛깔의 본견 리봉이 달린 순모의 중절모는 가볍고도 부드러웠다. 그에게 썩 잘 어울렸다. 문득 중학교 일 학년 영어책 첫장이던가, 둘째 장이던가에 나오는 이티스 어 캡, 이티스 어 햇 생각이 났다. 그 문장 삽화에 나오는 햇을 쓴 신사만큼이나 그의 모자 쓴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였다. 그러나 우리 집안 어른들 앞에서 저희는 중인 집안입니다고 말할 때보다는 덜 멋있었다. 내가 정말 그에게 반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고 속으로 되새기며 나는 은밀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예로부터 혼수없이 몸만 가는 시집을 허리춤에 참빗 하나 찔러넣고 간다고 했는데 나는 중절모 하나 달랑 들고 가는 시집이었다. 어머니의 아무것도 안 해주기는 아주 철저했다. 그 대신 딸이 시집 가서 역시 지체 높은 집에서 데려온 며느리는 다르다는 소리를 듣게끔 교육시켜 보내려는 조바심은 무슨 앙심처럼 집요하고도 정열적이었다. 이를테면 시부모님한테 조석문안 드리는 법도로부터 집안내와 친척들은 촌수와 아래 위턱에 따라 어떻게 부르는 게 점잖은 집안의 예절에 합당한지를 시시콜콜 가르치고 복습을 시키느라 정작 급하게 배워야할 밥 짓는 법이라던가, 저고리 동정 다는 법 따위는 치지도의 였다. 그때만 해도 그런 것도 안 가르쳐 보내는 거야말로 친정어머니가 욕 먹을 짓이었는데도 우리 어머니는 그러했다. 하긴 시집에 있지도 않은 하인한테 쓰는 말씨, 잡도리하는 법까지 가르쳤으니까. 그런 걸 가르치다가 친시누이는 없지만 시집 근방에 시외가가 살고 있어 자주 만나게 될 사촌 시누이는 여럿 있다는 걸 안 어머니는 갑자기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반가의 풍습은 손아래 시누이를 깍듯이 작은 아씨라고 불러야한다만 그까짓 중인한테 작은 아씨는 뭐. 그 사람들 풍습 따라 아가씨라 부르도록 해라. 알겠느냐?”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시대착오적이면서도 사람 헷갈리게하는 이런 양반집 규수다운 법도야말로 어머니가 장만할 수 있는 유일한 혼수인 걸 어쩌랴. 자연히 피로연까지도 그의 몫이 되었다. 그는 그 당시 서울에서 제일 큰 중국 요리집인 아서원에다 양가의 하객수를 다 먹일 만한 피로연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친정 친척들은 먼 친척, 가까운 친척, 외가 친외가 할것없이 모두 모두 양반님네였음으로 어쩌다 딸년 하나 중인한테 시집 보내 지체를 떨어뜨린 분풀이로 너무도 당당하게, 털끝만치도 굽 잡히지 않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모두 그 피로연에서 마음컷 먹고 마셨다. 그래도 돈푼이나 있는 집인가 봐, 그나마 다행이지 뭐유. 이렇게들 수근대면서. 그러나 막상 시집을 가보니 남들이 수근대고 나도 은근히 기대한 것 만큼 그는 부자가 아니었다. 작지만 제 집을 지니고 있었으니 아주 가난뱅이라곤 할 수 없어도 스물아홉 노총각이 되기까지 착실히 모아둔 돈을 색시 하나 싸데려오기 위해 고스란히 탕진한 뒤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탓할 계제도 아니었다. 먹고 살 만큼 벌어오는 직장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신혼생활의 이런저런 추억 중 가장 아늑하고 따수운 추억은 역시 모자와 관계가 있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출근 준비를 혼자서 할 수 있도록 길들였지만 넥타이 매는 것만은 아무리 가르쳐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나도 그걸 어디서 따로 배운 바가 있는 건 아니고 그가 하도 속 가닥과 겉 가닥의 길이를 들쭉날쭉하게 매길래 매듭 만드는 법은 그에게 배워가며 가즈런히 매주기 시작한 게 그만 버릇이 되고 말았다. 넥타이를 배주고 나면 모자를 건네 줄 차례였다. 그 동안 잠깐 모자를 매만졌다. 고가품답게 잘 빠진 모양은 늘 일정했지만 나는 괜히 가운데 누르는 부분과 둥근 테의 곡선을 조금씩 손 보면서 그 부드럽고 따수운 감촉을 즐겼다. 소탈한 그에게 사치로운 모자가 잘 어울리는 것도 묘한 즐거움이 되었다. 그가 지닌 유일한 사치품이 주는 낙은 약혼시절 그가 부자일지도 모른다고 꿈꾸던 낙과도 비슷하니 철 없는 것이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없고 어쩔 줄 모를 것 투성이인 시집살이를 그래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정서적 돌파구였다.



처음 그와 부부로 맺어졌을 때, 신혼의 서투른 행복에 적절한 소도구처럼 끼어들었던 모자를, 삼십오 년 후 그를 홀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시기각각 임박해 올 무렵 생각해 낼 게 뭐였을까. 세월의 덧없음을 거슬러 보려는 부질없는 생각은 뭐였을까. 세월의 덧없음을 거슬러 보려는 부질없는 생각은 그러나 절절했다. 자식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모자 선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낸 눈치를 보면서 어머니 이게 맞아요? 하고 자문을 구했다. 자식들은 에미의 의중에 있는 그 우아하고 품위 있는 최고급품 중절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요새는 아무도 그런 걸 쓰고 다니지 않으니 그런 걸 파는 데도 없나 보다. 나도 백화점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모자 파는 데부터 기웃거려 보았지만 자식들이 사오는 모자와 대동소이한 것밖에 팔고 있지 않았다. 중절모는 중절모이나 테가 너무 좁아 점잖지 못하고 질도 골덴, 화학섬유, 혼방, 면, 모 등 다양하고 줄무늬나 체크무늬로 된 것까지 있어 멋스럽긴 하나 경박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최초의 중절모는 꿰맨 자국이 한 군데도 없는 통짜였는데 오새 것은 다 바느질해서 만든 거였다. 그러나 집에서 물세탁을 해도 깜쪽같이 새 것처럼 보이는 이점이 있었다. 우리의 최초의 중절모는 당시의 미숙한 드라이크리닝 기술 때문에 이 년만에 못 쓰게 되고 말았었다.


내가 속으로 흡족치 못해 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는 자식들이 사온 모자는 뭐든지 다 좋아하며 번갈아 쓰고 다녔다. 어떤 모자를 쓰면 퇴직하여 유유자적하는 노교수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모자를 쓰면 현역의 유행가 작사자처럼 보였다가, 또 어떤 모자를 쓰면 평생 연예인에 연연하며 한번도 빛을 못 본 불우한 딴따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 그와는 인연이 먼 것들 뿐이었다. 역시 요새 모자는 취미로서의 모자지 정통 의관으로서의 모자는 아니었다. 나의 다양한 평가와는 달리 그는 아침에 모자를 쓰고 나갈 때마다 현관 거울을 보며 말했다. “ 어때 나 예술가 같지? 결혼전 한때는 토목기사였다지만 객지생활을 많이 해야 하는 게 싫어서 장사꾼으로 전향한 후 한 번도 딴 일에 한눈을 팔아 본 일이 없는 그와 예술처럼 안 어울리는 직이 또 있을까. 그의 숨은 마음에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면 혹시 글쟁이인 마누라에 대한 컴플렉스가 아니었을까. 나는 별것도 아닌 것에 신경을 쓰면서 그를 배웅했다.

 실제로 내가 내 일을 하면서 그에게 신경을 쓴 적은 거의 없으면서 말이다. 내가 내 일이 잘 안되어 두억시니 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이나 집안일과 부딪칠 때마다 그는 말했다. ”쉿 조용히 하자, 느이 엄마 또 거짓말이 딸리나 보다“ 혹은 손수 커피를 타 가지고 와서 “당신 또 거짓말이 막혔나 보구료”하고 놀리기도 했다. 그러면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나오면서, 그래 한낱 거짓부리인 것을 하고, 죽자구나 덤벼들던 그 암담한 악전고투에서 한걸음 물러날 여유가 생기곤 했다. 그렇다고 내 소설 쓰기가 그에겐 한낱 거짓말 만들기로밖엔 안 보였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자로 멋 부리는 것 외에는 보통때와 같은 시간에 보통때와 같은 모습으로 출근을 했지만 내 일상은 보통때하고 같을 수가 없었다. 이 보통때와 같은 나날이 오래 지속돼지이다,라고 기도도 하고 보통때와 같은 날을 연장시킬 수 있는 음식이나 생약에 관해 얻어들은 잡다한 정보에 따라 구하러다니기도 하고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는 병원의 지시나 처방해 준 약은 잘 지켰지만 수 많은 비방의 생약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해서 먹이기가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아무개도 이걸로 나았고 누구도이걸 먹고 깜쪽같아졌댄다고 설득을 해도 도무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열심히 구하고 만든 날 봐서 먹어달라고 애걸을 하는 게 차라리 빨랐다. 그 쪽에서 나에게 애원을 할 적도 있었다. “여보, 제발 우리 현대의학 하나만 믿도록 합시다. 이왕 자식을 둘씩이나 의학 공부시켰으니 그 정도의 의리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별 말도 안되는 의리였다.

그런 태도는 현대의학에 대한 믿음보다는 자식들에 대한 애정과, 자기 목숨에 대한 담담함에 연유했음직하다. 밀가루도 약으로 믿고 먹으면 호혐을 본다지만 아무리 좋은 약도 환자가 믿지 않으니 무슨 약효가 있을까 싶어 생약을 연구하고 만드는 일은 자꾸 서글퍼만졌다. 그 대신 저녁식사 준비는 신이 났다. 그가 지금 가장 열심히 하고저 하는 일은 병나기 전의 보통때처럼 사는 거였다. 보통때, 그는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제일 흡족하고 살 맛이 나 보였었다. 거의 유일한 취미가 식도락인 그는 음식 잘한다는 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건 휴일날 점심에 한하고, 보통날 저녁은 꼭 별식을 한두 가지쯤 장만한 내 집 식탁에서 이홉들이 소주를 반병이 채 안되게 비우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한없이 오래 하며 먹고 싶어 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하면서 버스정거장 쪽을 내다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가 모자를 쓰고 있다는 건 더 좋은 일이었다. 내 아물아물한 시력으로도 꾸역꾸역 내리는 사람들 속에서 쉽게 그를 가려낼 수가 있었다.


아아, 오늘도 그가 무사히 보통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내 곁에 돌아오고 있다. 그동안 그를 기다린 타는 목마름은 그가 휘적휘적 집으로 걸어오는 동안도 탐조등처럼 그를 비추며 좇았다. 그가 보통때와 다름없이 맛있는 저녁 식사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춘 표정으로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신혼때처럼 종종걸음으로 그를 맞이해 모자 먼저 받아 걸었다. 비록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는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일 멋있어졌다. 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한 적도 있었다. 일찍이 연애할 때도 신혼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건 순전히 살아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그리고나서 풍성한 식탁에 마주 앉으면 우린 더불어 살아 있음에 대한 안타까운 감사와 사랑으로 내일 걱정을 잊었다.
 
그 시간 그의 구미에 맞는 한 그릇의 두부찌개는 누가 천년까지 먹고살 보화를 가지고 와서 한 그릇의 두부찌개는 누가 천년까지 먹고살 보화를 가지고 와서 바꾸자고 해도 거들떠도 안볼 만큼 값진 것이었다. 남들이 십 년 후를 근심하고 백 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우리는 순간을 아까워했다. 죽음은 모든 살아있는 것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동물도 죽을 병에 들거나 상처를 입으면 괴로워하기도 하고 저희들 나름의 치료법도 있으리라. 그러나 죽음을 앞둔 시간의 아까움을 느끼고, 그 아까운 시간에 어떻게 독창적으로 살아있음을 누리고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건 인간만의 비장하나 업이 아닐까. 그가 선택한 인간다운 최선은 가장 아까운 시간을 보통처럼 구는 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순간순간 열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부부에게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열 달이나 계속됐다.



항암제를 삼 주일에 한 차례씩, 때로는 백혈구 부족으로 한주일 연기해서 사 주일에 한 차례씩 무려 열 번을 맞는데 팔개월이 걸렸고, 팔 개월 후 정밀검사 끝에 폐암은 거의 완치된 걸로 본다는 진단을 받았다. 거의 완치란 얼마나 애매하고도 반지빠른 말투인가. 그러나 주치의가 꼭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의 치료효과는 희귀한 케이스에 들 만큼 양호하나, 재발이나 전이의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마냥 항암제를 맞는다는 것도 인체가 견딜 노릇도 아닐뿐더러 또 지금까지의 임상경험으로 봐서 무한정 맞는다고 재발이나 전이를 방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듯의 어렵고 우회적인 말을 그렇게 풀이했을 뿐이다. 만일 재발했을 경우 신속하게 발견해서 항암제를 다시 맞을 수 잇게끔 매달 정기적인 검사를 받기로 하고 항암주사는 일단 중단을 했다. 그 동안 그에겐 일곱 개의 모자가 생겼다. 매일 아침 일곱 개의 모자를 이것저것 번갈아 써보며 멋부리는 버릇도 여전했다. 그가 어때? 나 예술가 같지? 하고 물으면 나도 예술가 좋아하시네, 꼭 난봉꾼 같네, 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냥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으로는 진담이었다. 아아, 그에게 마지막으로 로맨스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일까? 이왕이면 불꽃 같은. 보통으로 살기도 초인적인 힘이 드는 그를 두고 나는 이렇게 화려한 일탈을 꿈꾸었다. 남편의 연인을 가상해도 조금도 질투가 나지 않는 이 해하와도 같은 관대함은 실은 인간의 운명의 속절없음을 거슬러보려는 작은 몸부림 같은 거였다. 항암제를 중단한 지 두 달만에 그의 민둥머리에 삐죽삐죽 머리털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그도 거울로 그걸 확인하고 환성을 질렀다. 그는 소생하고 있는 걸까? 그는 암세포와 가장 비슷한 세포가 머리카락 세포라는 소리를 벌써 잊었는지 나도 같이 기뻐해주길 바랐다.
“당신은 모자가 아깝지도 않수?”
나는 도저히 꾸밀 수 없는 내 침울한 표정을 이렇게 변명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새벽 기침을 전전긍긍 기다리느라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그러나 암세포는 한 번 왔던 길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도 부엌 창문으로 그의 귀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그를 딴 사람과 가려낼 수가 있었다. 모자 때문이었다. 그 날 그는 갈색 줄무늬가 잇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가 이상했다. 꼭 비실비실 옆길로 새고 싶은 걸음걸이였다. 기분에 따라 또는 몸 컨디션에 따라 걸음걸이가 달라질 수도 있으련만 괜히 가슴 먼저 후들댔다. 그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왜 그렇게 이상하게 걷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 보기에도 그랬어? 참 별일이야. 똑바로 걸으려고 해도 자꾸만 비뚜루 나가잖아.”
그가 웃으면서 말했고 나 역시 웃으면서 그 얘기를 아들에게 했다. 설마 비뚜루 걷는 병도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아들의 반응은 심각했고 당장 누나와 매형에게 전화해서 여러말을 수근대더니 그 밤으로 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아버지한테 베란다 쪽으로 똑바로 걸어가 보라느니, 손가락으로 코끝을 가리키라느니, 두 팔로 앞으로 나란히를 해보라느니 꼭 세 살 먹은 어린애 재롱 보듯이 시험을 했다. 그리고 나서 내일 당장 뇌를 CT촬영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아직도 수련의 아니면 기초의학 전공인 그들의 진단의 한계였다. 그러나 나는 수도 없는 검사를 거친 노련한 주치의의 진단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몸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놈의 암이 뇌 속으로 옮아갔다는 걸 인정하는 건 너무도 무섭고 분노스러웠다. 견딜 수 없이 비참한 밤을 보내고 나서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품고 찾아간 병원에서 그러나 CT촬영은 불가능했다. 노사분규가 극도에 달했던 88년 초였다. 그가 그 동안 입원과 통원치료를 받아오던 종합병원도 막 그날 아침부터 간호사를 비롯한 종업원들이 파업에 들어가 병원업무가 마비돼 있었다. 환자들은 하릴 없이 발길을 돌리면서도 한 마디씩 한탄을 하거나 욕을 했다. 이층에선 일손을 놓고 권리를 부르짖는 근로자들의 노래소리, 구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에 떠밀려 나는 발길을 돌리는 대신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거기서 뭣들 하고 있어, 지금 내 남편이 죽어가는데, 제발 내 남편 좀 살려줘” 이런 아우성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그들은 이층 로비에 모여서 선창자를 따라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뒤에서 사담을 소근대거나 시시덕대는 패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머리에다 띠를 두르고 있었다. 머리띠에 붉은 물감으로 쓴 구호가 마치 상처에서 배어나온 핏자국처럼 분위기를 살기등등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뛰어올라온 기세와는 달리 잠시 우두망찰을 하고 서 있었다. 내가 어쩔 줄을 몰라했던 건 그들이나 그들이 자아내는 활기차면서도 살기등등한 분위기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였다. 노사분규의 현장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백화점에 쇼핑하러 갔다가도 쇼핑 대신 종업원들의 축제처럼 흥겨운 데모 구경만 실컷 한 적도 있었고, 택시나 지하철도 시한부로 파업을 예고해 놓고 있었다. 테레비 화면이 연일 대기업의 노사분규로만 채워지던 때였다. 남들이 겪는 것만치 불편도 겪고 걱정도 하면서도 나는 내가 노동자 편이라는 걸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노동자래서가 아니라 억압하는 쪽보다는 억압 당하는 쪽을, 가진 자보다는 못 가진 자를 편드는 건 내 기본적인 도덕심이었다. 더군다나 남편의 잦은 입원과 통원 치료로 종합병원과 일년 가까이 관계를 맺어오면서 그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체제에 넌더리가 난 뒤였다. 큰 병원 또한 대기업 못지 않게 시급히 달라져야 할 가장 비민주적인 기구라는 걸 뼈아프게 느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런 거대하고 오만한 체제의 말단에서 짓눌려만 온 노무자들의 권리행사에 맞닥뜨리자 동질감보다는 반감이 앞섰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홀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절망감과 피해의식 때문이었을까, 나에겐 그들 또한 막강한 강자로 보였다. 강자란 무엇인가? 목청 높은 가해자가 곧 강자인 것을. 그들이야말로 지금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겸비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다음날 딴 병원으로 CT촬영을 하러 갈 때였다. 자식들이 수소문하고 청을 넣고 해서 간신히 예약을 한 병원이었다. 그 쪽 지리에 서투른 나는 입구를 잘못 알고 미리 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병원 긴 담을 끼고 한참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자꾸만 비틀비틀 담으로 가서 부딪치면서 한없이 더디게 걸었다. 다시 전전날의 분노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화를 안내면 미칠 것 같았다. 그에게 화낼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 누구한테 낸단 말인가.



“제발 똑바로 좀 걸어봐요. 꼭 쥐구멍 찾는 게처럼 걷지 말고......”
나는 발까지 굴러가며 모질게 악다구니를 쳤다.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물게가 지금처럼 귀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벼가 누렇기 익을 무렵 동대문 시장에 가면 좀 비싸긴 해도 배꼽이 둥근 산 암케가 많이 나와 있곤 했다. 암케 딱지 속에 고약같이 검고 찐득한 알이 잔뜩 들어 있을 때였다. 그때를 맞춰 반접쯤의 게장을 담그는 건 김장 못지않은 우리집의 연례행사였다. 식구들이 다같이 유별나게 게장을 좋아했다. 산 게를 여러 마리 항아리 속에다 가두고 한 마리씩 꺼내 산 채로 손질하려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집게 발가락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도 해야 하지만, 줄줄이 딸려나온 게들이 제각기 도망을 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시어머니는 게가 쥐구멍으로 들어가면 평생 가난하다는 묘한 미신을 믿고 있었다. 오래 된 한옥엔 유난히 쥐구멍이 많았다. 게는 빠르다고는 볼 수 없지만 인간과는 다른 횡적인 방향감각 때문에 까딱 잘못 하다간 놓치기 일쑤였다. 시어머니는 손질은 당신이 하면서 달아나는 게가 쥐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들어오는 막중한 역할은 꼭 나한테 시켰다. 그러나 게에다 간장을 부어 죽인 후에도 다시 세어보아야만 안심을 할 정도로 면밀했으니 나는 자연히 그 일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남편한테 그 일을 고해바치며 그의 어머니 흉을 한바탕 보아야만 다소 스트레스가 풀릴 지경이었다. 그런 옛 일에 얽힌 농담이라면 얼마든지 재미나게도 그윽하게도 할 수 있었으련만 나는 고약한 성깔이 잔뜩 치받쳐 있었다. 여북해야 그가 딱하다는 듯이 그러나 역시 농담으로 받았다.
“당신이야말로 왜 그래? 꼭 틈바구니에 낀 쥐 같잖아.”
그리고 피식 웃더니 탄식하듯 덧붙였다.
“생전 틈바구니에 끼어봤어야지.”
그의 목소리가 하도 연민에 차있어서 나는 대꾸하지 못했다. 죽어가는 사람으로부터의 연민은 감동적이었다. 울어버릴 것 같았다.

CT촬영은 참으로 놀라운 첨단 과학이었다. 뇌를 가로 세로 여러 장으로 슬라이스 하듯이 나누어 찍은 단면사진은 내 눈으로도 고루 퍼진 암을 확인할 수 있을만큼 선명했다. 뇌는 혈관의 회로가 달라서 항암제가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치료법은 방사선을 뇌에다 쬐는 거였다. 방사선 치료란 죽는 연습이었다. 그 치료엔 아무도 입회하지 못했다. 방사선과 의사까지도 그를 치료대에 혼자 고정시켜놓고 나와서 밖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며 조종했다. 그 안에서 그는 어떤 기분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방사선이란 어떻게 생긴 빛일까? 그 깊이 모를 외로움과, 너무 밝아 차라리 암흑과 상통할 것 같은 빛에 대한 공포감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너무도 유사했다. 그는 이마가 까맣게 타도록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다시 해 본 CT촬영에서 암은 소멸되지도 줄지도 않은 채였다. 미국 가 있는 막내를 잠시 귀국토록 했다. 부고 받고 장사에 대올려고 허둥대는 것보다는 생전에 뵈러 오는 게 효도가 아니겠느냐는 딴 자식들의 의견이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뭐 사다드리면 좋겠느냐고 막내가 전화로 물어왔다. 약 종류를 묻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의 병세도 그렇지만, 때도 이미 미군엔 별의별 신효한 약, 불로초 같은 것까지는 있는 것처럼 여기던 촌스러운 시대가 아니었다. 나는 막내에게 모자를 사오라고 말했다. 최고급으로 사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과연 막내가 사온 모자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그의 모자의 원형과 가장 가까웠다. 순모로 된 통짜 중절모였고 견직 리봉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테가 너무 넓어 신사보자라기보다는 카우 보이 모자를 연상시켰다. 아니나다를까, 네 살짜리 손자녀석이 그 모자를 보단 “와아, 장고 모자다” 하면서 그걸 빼앗고 싶어했다. 녀석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주인공 장고가 그런 모자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모자를 쓴 채 안 빼앗기려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 여전히 비틀대며. 손자가 울음을 터뜨려도 그는 그 모자를 내놓지 않았다. 손자와의 마지막 장난이었다. 마지막 한 달가량 자리 보존하고 있을 때를 빼고는 그는 집에서도 줄창 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막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도 그 모자를 아꼈겠지만, 넓은 태는 방사선치료로 시꺼멓게 탄 이마를 가려주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 장고 모자가 그의 여덟 번째 모자이자 마지막 모자가 되었다.

나는 요새도 가끔 그가 남긴 여덟 개의 모자를 꺼내본다. 그안에서 머리카락 한오라기라도 찾아보려고 더듬어보지만 번번이 헛손질로 끝난다. 그 여러 개의 모자는 멋이나 체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민둥머리를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몸을 차디찬 땅 속에 묻은 건 확실한데 아침마다 우수수 지던 그 숱한 머리카락은 지금 어느 만큼 멀리 흩어져 티끌로 떠도는걸까. 생명의 가없음이 티끌과 다를 바 없다는 속절없는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그의 흔적을, 남긴 물질에서 찾는 것보다는 남긴 말이나 생각에서 찾는 게 그래도 조금은 덜 허전하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고, 잘난 척할 줄도 몰랐기 때문에 담소는 즐겼지만 그럴 듯한 말은 할 줄 몰랐다. 우리집엔 그 흔한 가훈도 없다. 그의 말이 생각나는 것도 그가 끼면 편안하고 여유로워지는 담소 분이기이지, 멋있거나 뜻깊은 말 뜻은 아니다.



오직 틈바구니만이 예외다. 내가 생전 틈바구니에 끼어보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일까? 분명한 뜻도 모르면서 감동을 받은 건 무슨 까닭일까? 그런 생각이 나를 자꾸 심각하게 한다. 그가 나 대신 가주던 동회나 세무서에 볼 일 보러 가서 똑똑치 못하게 굴다가 구박맞으면 이게 틈바구닌가 싶기도 하고, 사용자와 노동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칼자루 쥔 자와 칼날 쥔 자, 통일꾼과 반통일꾼이 서로 목청을 높여 싸우는 걸 봐도 전처럼 선뜻 어느 쪽이 옳거니 양자 택일이 안되고, 또 그놈의 틈바구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봐란 듯이 틈바구니에 끼기 위해선 거친 두 목청 사이에 낀 틈바구니의 숨결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는 그때 삶과 죽음의 틈바구니에서 어느 만큼은 내 원색적인 분노를 관조할 수도 있었기에 해본 단순한 연민의 소리일 뿐인 것을 내가 괜히 심각하게 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틈바구니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지 않는다. 그가 남긴 모자가 나에겐 모자라는 물질 이상이듯이 틈바구니란 말 또한 말 뜻 이상의 것, 한없이 추구해야 할 화두임을 면할 수가 없다.

출처:꿈꾸는 정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