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 vs. 사케
막걸리의 진화는 놀랍다. 막걸리의 괴로운 숙취를 기억하던 우리 세대로선 막걸리가 이토록 뒤끝 깨끗한 술로 재탄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막걸리가 일본 사케(청주)를 넘어 글로벌한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에 대해 나는 낙관적이지 않다. 막걸리가 '싸구려의 함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 롯데호텔 한식당에는 6종류의 막걸리가 팔리고 있다. 그중 가장 비싼 것(국순당 이화주)엔 6만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사케는 어떨까. 같은 롯데호텔 일식당에서 사케는 가장 싼 게 6만원이고, 무려 150만원짜리도 있다. 일본 주류상점에 가면 소비자 가격이 10만엔(약 130만원)을 넘는 초고가 사케도 수두룩하다. 반면 일본에 수출되는 막걸리는 525엔(약 6800원·국순당 '미몽')짜리가 가장 비싼 것이다. 이러다 영원히 '싸구려' 낙인이 찍힐까 겁난다.
일본의 명품 사케들이 비싼 값을 붙이는 것은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최상품 쌀을 60~70% 깎아내 알짜배기 정수(精髓)만으로 몇 년간 숙성시켜 빚었다는 식이다. 요컨대 100만원짜리 사케는 술 자체보다 술에 담긴 스토리를 100만원에 파는 것이다.
막걸리는 왜 파격적으로 비싼 명품을 못 만들까. 맛 좋은 막걸리를 값싸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은 막걸리 애호가로서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가격표에 100만원쯤은 호기롭게 매길 수 있는 명품 막걸리도 몇 개쯤은 보고 싶다.
# 오솔길 vs. 철학의 길
일본 교토에 '철학의 길'이란 관광 코스가 있다. 안내 책자엔 저명한 철학자가 명상하며 산책하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몇 년 전 교토 출장 갔을 때 멋진 이름에 혹해 찾아갔다가 약간은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운치 있는 오솔길이었지만 버스를 갈아타면서까지 찾아갈 만큼 대단한 곳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본의 '문화 화장술'은 탁월하다. 평범한 오솔길에 약간의 스토리 요소를 얹어 '철학의 길'이라는 엄청난 이름으로 포장해 내다니, 우리는 낯이 간지러워서도 못한다. 훌륭한 소재를 갖고도 포장이 서툴러 제 대접 못 받는 우리는 순진한 건가, 바보 같은 건가.
- 박정훈 사회정책부장